2026년 함양향교 제5회 전국 한시 백일장 운영 요강
(주최: 함양군청 주관: 함양향교 대회장: 함양향교 전교)
함양향교에서는 2026년도 전국한시백일장을 다음과 같이 개최하오니 뜻있는 문사의 옥장(玉章)을 기대합니다.
| 1. 일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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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장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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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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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참가 안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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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신청서 접수 방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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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작시 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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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심사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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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심사기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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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수상자 발표 및 시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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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시상 내역 | |
| 순 | 시상내역 | 시상금(원) | 인원 | 총 액 | 비 고 |
| 일반부 | |||||
| 1 | 장원 | 1,000,000 | 1 | 1,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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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차상(금상) | 700,000 | 4 | 2,000,000 | |
| 3 | 차하(은상) | 500,000 | 6 | 1,800,000 | |
| 4 | 참방(동상) | 200,000 | 15 | 3,000,000 | |
| 5 | 가작 | 100,000 | 50 | 5,000,000 | |
| 소계 | 100,000 | 76 | 12,800,000 | ||
| 학생부 | |||||
| 1 | 장원 | 500,000 | 1 | 500,000 | |
| 2 | 금상 | 300,000 | 1 | 300,000 | |
| 3 | 은상 | 200,000 | 2 | 400,000 | |
| 4 | 동상 | 150,000 | 4 | 600,000 | |
| 5 | 가작 | 70,000 | 72 | 5,040,000 | |
| 소계 | 80 | 6,840,000 | |||
| 합계 | 156 | 19,640,000 | |||
| 11. 응시생 유의 사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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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계(玉溪) 노진(盧禛) 선생 | |
옥계 노진(盧禛 1518~1578)은 조선 중기의 사림 문신으로, 학문과 행정, 그리고 효행을 함께 갖춘 인물이다.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 또는 칙암(則庵)이며,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그는 경상도 함양에서 태어나 유학 전통이 깊은 가문에서 성장하였다. 증조부는 예조참판(禮曹參判) 노숙동(盧叔仝)이고, 조부 노분(盧昐), 부친 노우명(盧友明) 또한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가는 사성원(司成院) 권시민(權時敏)의 가문이다. 이러한 가문 배경 속에서 어려서부터 성리학 수양과 도의를 중시하는 삶을 본받았다.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승문원 박사(承文院 博士)를 시작으로 전적(典籍), 예조 낭관(禮曹 郎官) 등을 거치며 중앙에서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기 그는 문장과 학식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었으나, 그의 진정한 면모는 지방관으로 나아가면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1555년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치성(治聲)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담양부사(潭陽府使), 진주목사(晉州牧使), 전주부윤(全州府尹), 곤양군수(昆陽郡守) 등을 지내며 각지에서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그는 세금과 부역을 공정하게 조정하고, 억울한 일을 직접 살펴 해결하는 등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행정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그는 청백리로 선발되어 청렴한 관료로 인정받았다. 중앙에서도 장령(掌令), 집의(執義),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都承旨), 이조참의(吏曹參議),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대사헌(大司憲)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1575년에는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고, 이후 이조판서(吏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공조판서(工曹判書), 예조판서 등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하거나 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사양이 아니라, 그의 삶이 권력보다 도의를 우선한 선택이었음을 보여준다. 노진의 삶에서 제일가는 특징은 효행이다. 그는 30여 년의 관직 생활 동안 실제로 조정에 머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이는 대부분 시간을 노모 봉양에 바쳤기 때문이다. 높은 관직에 있었음에도 서울에 집 한 칸 마련하지 않았고, 고향에도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권력과 재물을 가까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이를 멀리한 그의 태도는 청렴과 절제가 결합한 삶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은 당대에도 크게 인정되었다. 그는 생전에 효자로서 정려(旌閭)가 세워졌고, 사후에는 문효(文孝)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또한 남원의 창주서원(滄州書院), 함양의 당주서원(溏州書院)에 배향되어 학문과 덕행을 함께 기리는 인물이 되었다. 저서로는 《옥계문집(玉溪文集)》이 전한다. 그의 인품은 학자들과의 교유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기대승(奇大升), 노수신(盧守愼), 김인후(金麟厚) 등과 도의를 바탕으로 교유하였다. 이는 정치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학문과 인격을 중심으로 한 관계였다는 점에서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서울의 우사(寓舍)에서 별세하였을 때, 임금은 3일 동안 조례를 중지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향 함양으로 장례를 치를 때에는 고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슬퍼하였고,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조차 집에서 위패를 세우고 통곡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관료가 아니라 백성과 함께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노진의 생애는 조선 사림이 추구한 이상을 온전하게 구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학문으로 자신을 닦고, 행정으로 백성을 이롭게 하였으며, 개인의 삶에서는 효를 실천했다. 또한 권력과 재물을 멀리하고 절제함으로써 공직자의 본분을 지켰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한 시대의 관료를 넘어, 조선 사회가 이상으로 그린 선비의 모습을 실천으로 보여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그의 삶은 단지 과거의 미덕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에도 공직자의 자세와 인간의 도리를 성찰하게 하는 귀감(龜鑑)이 된다. 권력과 이익보다 책임과 절제를 앞세운 그의 태도는, 물질과 경쟁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 속에서도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공직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운 욕심을 억제하고, 가족에 대한 도리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조화롭게 실천한 점은 오늘날에도 본받을 만한 가치로 남아 있다. 결국 그의 삶은 시대를 초월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분명한 기준을 제시한다. * 참고 자료 · 함양군사(咸陽郡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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